제21회 항일역사문제 한·중 국제학술회의 성료 | ||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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□ 1943년 봄 어느 날, 충주의 열두 살(1932년생) 소녀 양종희는 기분이 좋았다. 마을에 온 일본 사람이 자기와 같이 가면 “일본으로 가서 옷도 잘 해주고 밥도 잘 먹여주고 공부도 시켜준다”고 했기 때문이다. 너무 기뻐서 껑충껑충 뛰기도 했다. ○ 그가 도착한 곳은 방적공장이었다. 방적공장에서는 기계가 멈춰서는 안되기 때문에 밤낮없이 노동이 계속됐다.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어김없이 폭력이 가해졌다. 밥을 굶는 것은 예사였다. 힘든 공장 생활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는데, 그 노래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.
○ 양종희는 해방이 되고서야 공장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. 그리고 그제서야 인천의 동양방적에서 일했다는 것을 알았다. 충주 밖을 나가본 적이 없어서 인천이 일본인지 한국인지도 몰랐던 그는 자기가 있는 곳이 일본인줄 알았다. 공장 밖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기 때문에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, 집으로는 어떻게 돌아가는지, 알기 어려웠다는 뜻이다. ○ 동양방적은 1914년에 창립된 일본의 회사로, 1934년 조선에 진출해 인천공장을 운영했다. ‘취업 사기’에 의해 공장으로 온 양종희는 해방되는 순간까지 가혹한 노동과 구타에 시달렸다. 임금은 체불되었고, 음식은 양과 질 모두 형편없었다. 심지어 해방 이후에도 철저히 방치되어,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어려움을 겪었다. 이 모든 과정이 당시 강제동원의 실태를 보여준다. ○ 태평양전쟁기 강제동원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양종희의 경험은 비단 한 개인의 경험에 그치지 않는다. 이 글을 발표한 이상의 교수(인천대)는 이러한 비인도적인 아동노동이 공장법이 적용되지 않았고 유년노동자가 많았던 1930년대 조선의 노동현실에, 전시하의 총동원 상황이 중첩된 결과라고 지적한다. ○ 이러한 내용을 담은 이상의 교수의 글은 지난 주 성료된 제21회 항일역사문제 한·중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되었다. □ 국사편찬위원회(위원장 허동현)와 중국 흑룡강성 사회과학원이 지난 2001년부터 공동으로 개최하여 올해로 제21회를 맞은 항일역사문제 한·중 국제학술회의가 부산에서 성료되었다. 이번 학술회의는 “일제의 아시아 침략전쟁과 민중의 피해”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. ○ 이 학술회의는 일제의 아시아 침략전쟁에 맞선 항일운동이라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모색하고 한국과 중국 간의 학술 교류를 활발히 하기 위해 2001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다. (2020~2022년은 코로나로 미개최) ○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중국과 한국의 연구자들이 총 10개의 주제로 발표를 했다. 청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역에서 이뤄진 일본의 전쟁범죄와 강제동원 피해를 폭넓게 다뤘다.
□ 이번 학술회의의 발표자 및 발표 주제는 다음과 같다. ○ 쑨원정(흑룡강성사회과학원) - 국제연맹의 중·일분쟁 중재 실패의 원인, 피해 및 영향 ○ 조재곤(서강대) - 청일·러일전쟁기 일제의 침탈과 민중의 피해 ○ 왕징룽(흑룡강성사회과학원) - 괴뢰 만주국 시기 헤이룽장지구 일본군 군사 요새 분석 ○ 장세윤(성균관대) - 일본군의 ‘간도참변’ 자행과 민중의 피해 ○ 류루(일본군제731부대범죄전시관) - 일본의 세균전과 중국의 피해 연구 ○ 리첸(지린대) - 일본의 압록강 유역 삼림자원 초기 조사와 수탈 ○ 이송순(고려대) - 아태전쟁기 일제의 조선 내 물자 수탈과 민중의 피해 ○ 쑨위(하얼빈사범대) - 근대 이래 일본의 중국 둥베이 구리[銅] 자원 조사와 수탈 ○ 조건(동국대) - 아태전쟁기 ‘조선군’의 아시아 침략과 군인동원 피해 □ 국사편찬위원회 허동현 위원장은 “이번 한중 국제학술회의를 통해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동아시아 각국의 민중들이 겪은 처참한 피해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”고 지적하고, “국제학술회의를 통해 확인된 추가적인 쟁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심도 깊은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”이라고 밝혔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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